'생각'에 해당되는 글 4건

  1. 사고의 정의
  2. 환경문제
  3. 짧은 글
  4. 기억의 철학

사고의 정의

인슈타인은 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개념의 조작, 즉 개념들 사이에 공고한 기능적 관계를 만들고 사용하는 것이고, 이러한 개념들에 감각 경험을 배분하는 것이다."

  사고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헬름홀츠가 1894년에 쓴 '우리의 감각 인상의 기원과 바른 해석'에서 사고에 대한 분석과 거의 똑같고, 시각 이미지가 <개념>이라고 한 말은 1897년의 볼츠만의 정의와도 같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관점은 헬름홀츠의 관점과 두 가지 본질적인 이유에서 다르다. 첫째, 아인슈타인에게 사고는 <개념을 가지고 자유롭게 노는 것>이고, 이것은 푸앵카레의 관점과 비슷하다. 둘째, 감각 경험과 개념 사이의 관계 조정은 감각 데이터 또는 실험 데이터와 정확한 물리 법칙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직관에 의해 뛰어넘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창조적 사고가 본질적으로 비언어적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 경험에 대해 자발적으로 '놀라워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놀라워한다>는 말의 뜻을 최대한 정교하게 했다. 놀라움은 <어떤 경험이 이미 우리 속에 충분히 정착된 세계 개념과 충돌할 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대여섯 살 때 나침반을 보고, 바늘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듯이 한 방향을 유지하는 것을 <놀라워한> 기억을 회상했다. 이 이미지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그는 물리학을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기초한 것과 같은 장이론으로 정식화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장이론은 접촉에 의한 작용을 추상화한 것이다.

  직관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세 가지 정의는 <놀라움>이라는 말의 용법에 모두 융합된다. 아인슈타인이 직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복사의 존재와 구성에 관한 우리의 직관의 발전에 관해'(1909)에서 였다. 소제목이 보여 주듯이,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던 빛의 파동론과 자기가 1905년에 발표한 입자론, 즉 광양자론 사이의 직관의 괴리를 다루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새로운 시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뉴턴 역학의 연장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두 이론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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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

장경제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비례해서 환경문제가 심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면, 시장 혹은 기술이 환경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롭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기술/시장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환경문제의 원인을 전적으로 시장이나 과학기술에 돌리는 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오히려 이들은 이 문제를 적절한 시장의 부재에서 찾는다. 자연자원을 이용함에 있어 엄밀하게 시장 논리를 적용하게 되며 더 효율적인 개발은 물론, 자원소비나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기술 개발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 개발이라는 것은 인류생존에 불가피한 요소이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효율적인 시장의 부재와 기술의 오용에 있음을 기술이나 시장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 환경주의자들은 기술/시장 지상주의가 시장이나 과학기술의 선기능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시켜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자원고갈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단순한 원리조차 무시한 채, 경제적 부에만 치중한 나머지 발생한 결과라고 반박한다. 그들은 시장이 아무리 효율적으로 구성되고, 기술이 선용된다고 하더라도 자원의 한계나 지구의 환경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고도성장을 추구하고자 하는 입장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자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하지만, 개발과정에서 소요되는 자원, 시행착오로 인한 복구 자원, 예상치 못한 부작용 등으로 인해 소요되는 자원과 유발되는 환경오염 역시 그에 못지않다고 비판한다. 결국 경제나 기술의 발전이 1인당 소비 자원을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지구 전체의 인구를 증가시켜 자원 소모/환경오염은 점차 가속화될 것이라는 비관론을 제시한다.

  생태주의자들 역시 기술/시장 지상주의를 비판한다. 그들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기술이 존재하지만 반대로 자원을 소모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기술도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그동안 생산되었던 구식의 장비들이 폐기처분되면서 환경오염/자원낭비를 더욱 가속화시킨다고 지적한다. 환경보호와 자원 절약을 위해서는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나 시장의 확대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사실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해야 하는 연구는 그 규모상 현실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기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연 이용에 있어 시장의 논리를 적용하자는 주장은 애초부터 실현불가능한 아전인수식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생태주의자들은 환경주의자들에 대해서 적절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또한 비판한다. 환경주의자들은 현재의 시장중심주의나 기술지상주의 같은 것에 대해서 비판만 반복하고 있을 뿐, 그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류는 근대의 산물을 모두 버리고 과거로 회귀해야 하는 것인가 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은 현 상태에 대한 타개책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대안 모델을 제시한다. 생태주의자들이 보기에 지구는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즉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지구 전체적으로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환경오염의 정도를 가늠하고 그를 바탕으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따져서 인류의 발전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생태주의자들은 아주 완만한 성장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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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생명은 바야흐로 죽음으로, 죽음은 바야흐로 생명으로 변한다. 가능은 바야흐로 불가능하므로, 불가능은 바야흐로 가능으로 변한다. 옳음은 그름으로 말미암고, 그름은 옳음에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인은 옳고 그름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흐름에 비추어 보면, 이것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하루만 살다가는 버섯은 한달 중의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여름만 살다가는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들은 짧게 사는 존재들이다. 남쪽에 사는 명령 나무는 500년을 봄으로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는 요즈음 장수한 것으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아지고자 하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하루살이인 버섯에게는 초하루와 그믐은 '존재하지 않음'이지만 매미에게는 '있음'이다. 팽조의 800년 삶이 인간들에게는 매우 장구한 삶이지만, 명령나무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짧은 '하루살이'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천지 대자연은 나에게 형체를 주고 나서, 삶으로써 나를 고달프게 하였고, 늙음으로써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하는 것이다. 지금 노련한 대장장이가 녹인 쇠를 부어 도구를 만들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쇳물이 뛰어 나서면서 '나는 명검이 되어야 해'라고 외친다면, 대장장이는 이를 상서롭지 못한 쇠라고 여길 것이다. 지금 어쩌다가 우연히 사람의 형체를 만나서 태어난 것일뿐인데, '꼭 사람이 되어야 해'라고 존재의 절대성을 고집한다면 조물자는 나를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대기가 기운을 기를 토해낸 것을 바람이라 한다. 한 번 불면 수많은 곳에서 성난 소리들이 나온다. 높은 산 속에 백여 아름이나 되는 거목의 깊은 구멍들에서, 마치 급한 물소리, 화살 날아가는 소리, 질책하는 소리, 곡하는 소리, 숨 쉬는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센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들도 소리를 멈춘다. 기쁨과 분노가 서로 엇갈리게 되고, 우매한 자와 똑똑한 자가 서로 속이니 인간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나의 바람이 불어 천천만만의 소리가 나는 것은 구멍들이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여, 모두 스스로 취한 소리다.

나는 내 자신이 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천지로부터 음양의 기운을 받아서 생겨난 것으로 스스로를 생각 해 보니, 내가 우주 안에 있다는 것은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비슷하여, 바야흐로 적은 양으로 보이는데, 또 어떻게 스스로 많은 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주 안에 사해가 있다는 것은 연못 안의 물병만한 빈틈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을 만 가지 존재라고 부른다면, 사람은 그 중에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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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철학

A의 철학은 '기억의 철학' 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영혼이 지상으로 유배되어 육체의 감옥에 갖히는 것이다. 
지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전에 모두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인간들은 이데아에서 추방되면서 과거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질은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가 아니라 불멸하는 영혼이며, 인간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불변한 이데아계이다. A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운다거나 알게 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영혼으로 이데아계에 머물 때 이미 완전하게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교육, 체험, 독서 등을 통해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는 이데아계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완전한 지식을 되찾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앎은 상기이고, 교사는 학생이 잊고 있던 지식을 기억하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자일 뿐이다.
  여기서 A가 인간을 '지식의 임산부'로 비유한 이유가 명확해진다. 임산부들이 아이를 배듯이 인간들은 지식 혹은 진리를 자기 안에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임산부에게 조산원이 필요하듯이 이 지식을 잉태한 인류에게는 산파가 필요하다. B가 산파를 자처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B에 따르면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를 공격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질문을 통해서 망각했던 기억들을 상대방이 스스로 회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B는 경건, 용기, 덕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 성질을 밝히려고 했다. 그래서 항상 도덕에 관심을 두고 개념을 정의하는데 매달렸다. 조각을 완성시키려면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쪼아 내서 형체를 만들어 가야 하듯이 아무런 근거없는 막연한 상식을 하나씩 제거하면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B의 철학은 꼼꼼하게 따져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논쟁을 거치지 않은 것은 '의견' 으로 논쟁을 거친 것만을 '지식' 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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